목민심서(牧民心書)와 호지명(胡志明)
임금(정조)은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의 부정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던중, 민란이 가장 빈번했던 곡산부사로 정약용을 보낸다.
그는 조세와 부역을 공평히 하고 옥사를 너그럽게 다스려 유능한 목민관으로 명성을 떨쳤다. 이 처럼 다산 선생은 절세의 경륜을 품었으나 당파싸움의 결과, 소인배들의 질시를 받아 전남 강진에 유배(流配)된 채로 노년의 18년 세월을 보내시고. 이 유배생활중에 선각자 다산(茶山)선생은 목민심서 48권을 남기신다. 다산 선생이 이 책 이름을 지을 때의 심정을 책의 머리말에 쓰고 있다. '양순한 인민에게 위해를 가할 모든 위험요소(감사와 수령은 나라의 大盜요 향리는 굶주린 솔개와 같다. 선비란 대낮에 도포입고 도적질하는 사람이다.--목민심서中)들을 말끔히 제거하여 온순하고 양같은 인민들이 마음놓고 살아갈 수 있도록 백성을 도와주는 일'을 '목(牧)'이라고 정의한 것이다. 또 자신이 품은 뜻을 현실 속에서 펼칠 길을 찾지 못한 채 유배되어 사는 몸으로 헛되이 세월만 보내기에 마음으로만 쓰는 글이라 하여 심서(心書)란 제목을 붙였다는 것이다.
목민심서는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고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토로한 목민관이 지켜야 할 금과옥조다. 그런데도 [목민심서]에서 제시한 그의 방안을 수용하기는커녕 읽어주지도 않는 현실을 통탄했다. '알아주는 자는 적고 비방하려는 자는 많으니, 만약 천명(天命)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 줌의 불쏘시개로 불태워버려도 좋다. '고 말씀하셨다. 중국, 한국, 일본, 월남 등은 같은 한자문명권(漢字文明圈)이기에 한문(漢文)으로 쓰인 목민심서가 이들 나라에서 널리 읽혀져 왔다.
특히 월남의 공산주의자요, 민족주의자로서 월남 통일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던 비전과 의지의 인물 호치민은 평생토록 다산의 목민심서를 애독하였다고 한다.
그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급히 도망하게 될 때에는 다른 소지품은 못 가져가도 목민심서만큼은 꼭 들고 도망하였다고 전해진다. 지금도 베트남 호지명 박물관에는 생전에 '호 아저씨' 가 즐겨 읽곤 했던 목민심서가 전시되어 있다 지금 이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.
과연 호지명은 월맹군과 싸운 원수의 나라 한국인의 저서를 왜 그토록 애독하였는가? |
출처:화목한 사람들 카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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